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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쓸쓸하고 괴로운 인생을 살겠지만 2

그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의 유명한 기행들은 사실 말 그대로 너무나 유명해서 굳이 내가 여기서 열거할 필요는 아마 없을 터이지만, 다만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 이상한 행위들을 피눈물을 쏟으며 지켜보았던 그의 지지자들의 마음이 그렇게 편치 않았을 것이 틀림없을 거란 사실이다.

어쨌든 그의 생의 초기 반생에 저지른(?) 이상한 행동들은 최소한 재기발랄한 면모라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비록 소수일지언정) 그 정신에 충실하게 감복했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었던 것은 뭐냐하면, 그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만 같은 창의적인 발상들에게서 어떻게, 언급하기 진부할 정도로 고색창연한 정신들을 느낄 수 있게 했을까라는 점이다. 누구나 그 당시의 그를 보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매우 적은 수의 지지자들만을(열광적이긴 하지만) 가지고 있었고, 그 이후로도 상식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을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갑자기 엄청난 수의 지지의 폭등을 등에 업고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등극했다. 이 사태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 극적이고도 열광적인 지지에 사실상 그의 사상적 성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지긋지긋한 관행들에 반기를 들던 사람들이 대안으로서 선택된 것에 불과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그가 펼치게 될 놀라운 사건들은 애초부터 불행의 씨앗을 내재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가 위대한 사람으로 등극하게 된 이 사건이 이 세계가 가지게 된 최초의 행운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 있던 정신들이 너무나 퇴폐적인지라, 그것들을 언젠가 뽑아내지 않고는 누구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그 일을 한단 말인가? 검은 사회에선 위대한 사람마저 어두운 빛을 띠게 마련이었다. 정말로 우연히 일어났던 일이고, 아마 평소의 시스템이었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지만, 모두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바람에 놀라운 행운이 생겨버렸다.

자, 그가 위대한 사람으로 등극한 후에 했던 일들을 상기해 보자. 모든 것들에 영광의 밝은 빛이 드리워져 있는가? 절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실상, 그가 위대한 사람에 있었던 기간 동안 이 사회는 재앙에 가까웠다(혹은 재앙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가 위대한 사람이 된 후에도 절대 위대한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정신없는 기행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를 지지했던 모든 사람들이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다수의 지지자들이 그가 저지르고 있는 저 미친 짓들을 최초로 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행은 그의 평가를 계속해서 추락시켰고, 그는 놀랍게도 추락하는 자신의 위신을 바라보며 재미있어하는 듯 했다.

그의 비판 자체는 정당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비판은 비난이 되었고, 그 비난은 결국 또 다른 비난을 불러왔다. 말하자면 “저렇게 비난을 받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은 미친게 분명하다”는 식의 비난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난 자체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항상 만면에 미소를 띠며 또 다른 기행을 계획하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대는 끝나 갔다. 사람들은 결국 원래의 거칠게 얽힌 사람들 사이에서 위대한 사람을 만들어 냈고 그 새로운 사람은 사회의 어두웠던 옛 모습을 거의 완벽히 복원했다. 아마 몇백 년간은 이러한 사회가 이어질 게 분명했는데, 왜냐하면 결국 사람들은 그의 시대에 깨달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의 엽기적인 만행들의 의미를 알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지극히 비참한 블랙코미디를 써 놓고는 사람들에게 웃으라고 강요하면, 그 어느 누가 대사를 이해라도 할 것인가! 이것은 역사상 가장 어려운 극본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년은 그의 비극처럼 비참했으며, 난 이미 이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우주공간에 몸을 던져 의식이 없는 전자기파만 남겼다. 그를 추모하는 천억 명 정도의 사람들이 대규모의 물결을 만들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나는 그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에 대해 사고하기보단, 무엇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가에 대해 사고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 우주의 단 한 사람이다. 그도 아마 우주의 단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와 그에 뒤를 이은 또 다른 한 사람이 이 우주에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단 한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쓸쓸하고 괴로운 인생을 살겠지만 그렇다고 뭐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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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의일견식 | 2009/05/28 07:51 | 트랙백 | 덧글(0)

72 - 쓸쓸하고 외로운 인생을 살겠지만

정말 일년 새에 많은 것이 변했다. 그들은 이제 결혼과 육아와 직장과 연봉에 대해서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도 어른이 되었다. 그러니까 난 친구들의 술자리 내에서도 별로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기대했었지만, 역시 여기서도 조금 더 외로워졌으며, 그냥 자기 애기가 뭘 먹고 뭘 싸는지 뭐 그런 얘기들에 맞장구나 몇 번 쳐주다가 눈치를 봐서 바람이나 쐴 겸 술집 밖으로 나왔다. 달은 밝았으나 또한 도시의 불빛도 밝았다. 나는 예전이 그리워졌다. 적어도 그들은 나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우주의 법칙이라던가, 의식과 자유의지라던가, 과격한 정치적 견해 따위, 어쩌면 세상과 동떨어진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모두들 맞장구를 쳐주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나만 변하지 않았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열띠게 토론하던 그 때의 내 친구들은 이제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살아남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만 아직 그대로였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이 기묘한 위화감은 내가 죽을 때까지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나는 과거에 어떤 결심을 했으며, 그 결심은 아직까지 유효하고, 내가 죽을 때까지 따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난 계속해서 무엇이 옳은 일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사고할 것이며 또 그 사고한 결론대로 행동할 것이다. 내 친구들이 다 떠나간다고 해도 하는 수 없다. 그들을 탓하지는 않겠고 나를 변화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쓸쓸하고 외로운 인생을 살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지구상의 단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살아야 함을 어쩔 수 있겠는가.

by 나비의일견식 | 2009/04/27 01:44 | 나의 픽션들 | 트랙백 | 덧글(4)

과학도서 추천 릴레이

http://basil83.egloos.com/4890390
http://lovos.egloos.com/2271423
http://liberatio.kr/2009/03/903/
http://www.nanael.net/396

과학도서 추천 릴레이의 바통을 넘겨받았습니다. 그래서 과학도서 세 권을 추천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교양과학도서 덕후인 것은 제 주변 사람 몇몇만 알고 별로 없지요. 제 교양과학책 사랑은 남달라서, 교양과학책만을 한우충동 오거서만큼 읽었다고 떠벌리고 다니시는 그야말로 나름 유명하신 디씨 과갤의 꾸준글러 '교양과학'이란 분이 있는데, 이분과 키배떠도 꿀리지 않을 정도의 자신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제가 모기불과 같은 책 안 읽은 티 막 내고 다니는 무식이 철철 넘치는 녀석들한테 책 좀 읽으라고 강조하는 거고요.

좀 더 유익하고 특이한 선정을 위해서 제 자신만의 선정기준을 잡아 봤습니다.

1. (적당히) 과학적일 것.

과학도서 추천하는 데 그 책이 과학적일 것은 당연한 소리지만 괄호 안에 들어간 '적당히'란 말은 말하자면 너무 과학적이지도 또 너무 비과학적이지도 않은 책을 뽑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비과학적이지도 않은 책이란 건 뭐 그렇다쳐도 너무 과학적이지도 않은 책이란 건 이런 겁니다. 과거 연구들을 참조해서 사람이름과 년도를 나열만 하는 교과서같은 책, 물리학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이공계생만 알아들을 수식을 존나 들이대는 책, 저자가 너무나도 슈퍼과학자인 나머지 이론중심적이고 저자 말고는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을 분야를 말하는 그런 책 말입니다. 이런 책은 전공 교과서로서는 성공적일지 몰라도 교양과학책으로서는 아닌 것이죠.

2. 환상적일 것.

교양과학은 모름지기 읽으면서 소설과도 같은 박진감과 스펙터클함을, 때로는 눈물까지 짓게 만들 정도의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교양과학책의 역할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에요. '재미있는' 지식을 쌓는 것이 목적입니다. 재미가 없는 책은 전공자들이 다 읽어줍니다. 우린 그런 재미없는 지식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3. 학제적일 것.

물리니 생물이니 지구과학이니 하는 분류는 근대 과학의 발상입니다. 그걸 아직까지 지키고 있다는 건 명백한 시대착오에요.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지요. 카오스 현상을 연구하면서 목성 대적점에서 심장박동까지를 아우를 수도 있는 거고, 의식을 연구하기 위해서 양자역학에서부터 최신 의학 기술까지를 섭렵할 수도 있는 겁니다.

4. 철학적일 것.

말하자면 '철학적'인 거지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겁니다. 우주에 대한 성찰, 인간성에 대한 고민, 학문에 대한 열정, 법칙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심 등등...




이런, 이게 바로 나야! 1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외 엮고지음, 김동광 옮김 / 사이언스북스
나의 점수 :
적당히 과학적: ★★★★
환상적: ★★★★★
학제적: ★★★★★
철학적: ★★★

빨간 책 말고도 두 번째 권(파란색)이 더 있습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라는 사람은 '괴델·에셔·바하'라는 경이적인 책을 쓴 사람이고, 공저자인 대니얼 데넷은 진화와 의식을 가지고 철학을 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의 책들은 아래에 좀 더 말씀을 드리지요.

이 책의 주제는 '의식'입니다. 의식이라는 주제는 제가 단연코 말하는데 과학자라는 직업이 생긴 이래로 가장 도전적인 주제임이 틀림없습니다. 의식은 사밀성이라는 성질과 감각질이라는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과학적 방법론이 원천적으로 접근하기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과학이 의식을 설명하려고 하냐면, 분명한 현상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며, 존재한다는 틀림없는 사실을 가지고 있는 어떤 현상을 연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들이시기 때문이죠.

책의 구성은 과거 이름난 작가들(스와니스타프 렘이나 보르헤스 등)의 SF와 환상소설들, 유명한 인지과학의 논문들(튜링의 튜링테스트나 네이글의 박쥐 논문 같은 거), 그리고 몇 편의 책의 저자들의 글이 실려 있고, 저자들의 해설이 뒤에 붙어 있는 형식입니다. 소설들 하나하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훌륭하며, 논문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유명한 논문들이라 (재미가 없을지언정)안읽을 수가 없으며, 특히 마지막에 실려 있는 호프스태터의 '아인슈타인=책 논증'은 정말 질질 쌉니다. 책을 덮은 후에는 바지가 촉촉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지요.


마음의 진화
대니얼 C. 데닛 지음, 이희재 옮김 / 사이언스북스
나의 점수 :
적당히 과학적: ★★★
환상적: ★★★
학제적: ★★★★★
철학적: ★★★★★


대니얼 데닛은 철학자이며, 서문에도 이 책은 철학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적당히 과학적'에 별수가 적은 것은, 너무 과학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별로 안 과학적이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두루뭉술할지언정 생물과 진화와 지능과 의식에 대한 충분히 과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넣었습니다.

이 책의 큰 주제는, 말하자면 제목 그대로 '마음'이 어떻게 '진화'하였는가입니다. 철학적이라고 할 만한 부분은 진화론을 연구한 선대 연구자들의 참고논문을 무차별 싸이트하는 식이 아니고, '지향성'이나 '생산과 검증의 탑'과 같은 데닛만의 독특한 이론을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철학책 치고는 매우 쉽고(사실 데닛은 쉬운 책을 쓰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두께도 얼마 안 되죠. 뭐 양 얼마 안 되는게 자랑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사실 데닛의 책 가운데 더 유명한 책들(Consciousness Explained, Darwin's Dangerous Idea)같은 책이 있지만 번역이 안 되어 있습니다. 저도 사놓고 안 읽어서 책이 누래지고 있지요. 글쎄 뭐 이 책보다 훨씬 좋을 수도 있으니까 영어 좀 되시는 분은 읽어보시죠.

황제의 새마음 -상
로저 펜로즈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나의 점수 :
적당히 과학적: ★★
환상적: ★★★★★
학제적: ★★★
철학적: ★★★★


두 권짜리 책입니다. 로저 펜로즈는 원래는 유명한 수리물리학자고 펜로즈의 타일이나 펜로즈의 삼각형 처럼 자기 이름이 붙은 뭔가그런 거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 이 사람이 '마음'에 대해 뭔가 썼다고 한데, 말하자면 양자역학의 마스코트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에서 뭔가 께름찍한 바로 그 부분을 의식의 신비를 통해 동시에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래서 양자역학의 신비도 풀고 의식의 신비도 풀고) 그런 시도로 출발한 책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건대 이 책은 양자역학+심리학의 학제적 주제 되겠습니다(안타깝게도 이 사람의 심리학 지식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만). 수학(괴델), 컴퓨터과학(튜링)에서부터 시작되는 논의는 지 전공분야인 물리학을 휘몰아치면서 양자역학의 부분인 바로 그 지점을 향해 갑니다. 거의 소설을 써내려가는 식으로 양자역학과 우주론의 통합 이론인 뭔가의 이론에 대해 막 설명을 하는데, 그게 바로 마음의 신비이며, 슈뢰딩거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짓는 의식의 관측이 바로 이것이고, 우리가 의식에 대해서 아무리 파고들어도 아직까지 모르겠는 그 이유가 바로 양자역학과 우주론의 통합 이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허황된 소설을 읽는 기분인데, 이게 그 유명한 로저 펜로즈라니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 참 난감한 책 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튜링머신에 대한 설명이 매우 잘 되어 있고, 고전역학과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따위의 물리학 이론을 나름대로 재밌게 설명해 놓았습니다(수식이 쪼끔 많긴 합니다). 한가지 유념하실 점은, 현재의 의식 연구자들은 이런 양자역학 이론 따위는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왕따죠. 그도 그럴 것이, 나오지도 않은 물리학 통합 이론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밖에 추천하고 싶은 책

사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발번역이라던가, 너무 유명해서 추천할 가치도 없는 책들입니다. 그건 바로 '이기적 유전자'와 '괴델·에셔·바흐'죠. 제가 사실 도킨스라면 껌벅 죽는 도킨스 빠돌이인데, 이기적 유전자는 이거 뭐 추천해봤자 주둥이만 아플 정도로 유명한 책이라 걍 뺐습니다. 게다가 번역에 대해서 징징대는 놈들이 많아서요. 뭐 전 번역 별로 신경 안 쓰고 읽었습니다. 이 책으로 말씀드리자면, 마치 뒷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기듯이 이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 낸 책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은, 그것이 정말로 진실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죠.

괴델·에셔·바흐는 위에서 말씀드린 호프스태터의 책입니다. 이 책도 매우 유명한데 유명한 이유중에 발번역이 30%는 차지할 겁니다. 그만큼 번역에 대해서 욕을 많이 먹기로 정평이 나 있죠. 안타깝게도 원서 자체도 매우 어려운 편입니다. 괴델의 그 이론을 설명하려니 수식이 난무할 수밖에 없을 텐데, 뭐 어쨌든 그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번역본을 읽고 제대로 이해했다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합니다. 아 물론 저는 번역본으로 읽고 나름대로 잘 이해했습니다(읽고 이해하는 데 35년이 걸리긴 했지만). 저도 이공계 출신인지라 영어보다 수식 읽는게 편해요.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이 책은 제가 지금까지 접해본 책 중에 가장 경이롭고 신비하고 싸이코천재같은 미친 책입니다.

덧붙여 제게 바통을 넘겨 주신 잡상 님께 감사드리고요, 저도 사실 이글루스에 서식하는 일부 병신(모기불 같은)과 그밖의 소위 블로거들의 친목질 세계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이웃 블로거 같은 게 없습니다. 다음 주자 선정에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추가: 다음 타자로 브루웩님이 선정되었습니다. 감사해요~

by 나비의일견식 | 2009/04/09 15:40 | 트랙백 | 덧글(5)

71 - 평화로운 지구

그는 계속해서 연설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모른체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이 자본과 탐욕과 헛된 종교의 망상과 고질적인 시스템의 병폐로 인해 병들어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멸종되어 가는 희귀새의 슬픈 울음소리를 곧 들을 수 없게 됨을 알고도 멍하니 바라보고 한탄해야만 합니까? 어째서 우리는 몇억 마리나 되는 소와 돼지와 닭과 그밖의 모든 더럽고 고통스러운 사육장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의 고통을 모른체하고 자신의 탐욕스러운 식탁을 채워야 합니까? 어째서 우리는 한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의 소중함을 확실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닌, 한낱 도구에 불과한 시스템이 잘못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몇천만 명이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어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척 해야 합니까? 어째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지킬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을 아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저 야만적인 자본주의의 노예들에게 우리의 파멸을 약속해야 합니까?”

장내는 고요했다.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마음가짐이 문제입니까, 시스템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아름답고 명쾌한 해답입니다. 누구나 이것의 좋은 점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것을 실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실행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단입니다. 마음가짐입니다. 저는 그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완료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구는 여기 시간으로 내일 아침 9시에 역사상으로 최고의 평화로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약속합니다.”

확실히 전지구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 치고는 눈 깜짝할 새의 일이었다. 연설이 끝난 시점인 오후 6시로부터 시작해 다음날 아침 9시에 이르는 15시간동안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지구는 오전 9시에 그리고 그 이후로도 매우 평화로와졌다.

by 나비의일견식 | 2009/03/31 01:02 | 나의 픽션들 | 트랙백 | 덧글(4)

response to: 츤데레의 진화심리학적 해석에 필요한 추가 연구

츤데레의 진화심리학적 해석에 필요한 추가 연구

츤데레적 속성은 확실히 단기적 성 전략을 추구하는 남성 및 헌신성이 부족한 남성들을 내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너무 과한 '체'로 작용할 수도 있는데요.

그만큼 츤데레 속성의 여성들은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에 있어서 자신이 있는 것 아닐까요? 데이비드 버스 등의 연구에 의하면 여성의 성적 매력을 촉발시킬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들이 번식적 가치(reproductive value)와 젊음, 건강, 신체적 척도들(예를 들면, 허리 대 엉덩이 비율), 미의 기준들(예를 들면, 얼굴의 대칭성) 등과 같이 매우 많은 종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러한 성적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성질들에 대해 자신이 있는 여성들이 츤데레적 속성을 발휘하여 가치를 높이는 일을 수행할 것입니다.

어떤 유전자의 표현형이 '츤데레'라 해 봅시다. 이 유전자가 아무 때나 발현된다면 우연히 성적 매력이 떨어지는 개체 안에 들어갔을 때 번식하지 못하고 대가 끊길 것입니다.(예쁘지도 않은데 츤츤대니까) 츤데레 유전자가 어떤 조건에서 발현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츤데레 유전자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유전자들이 그렇죠 아마). 만약 개체의 성적 매력이 남자들을 잘 꼬실 수 있을 정도로 충만하다면, 츤데레 유전자가 발현되어 자신과 자신의 자식들에게 충실한 남성들을 적절히 골라냅니다. 만약 개체의 성적 매력이 떨어진다면, 당연히 츤데레 유전자는 발현되지 못하고 조용히 묻혀 있겠죠.

나이가 들 수록 츤데레 속성이 줄어든다거나(주위의 노처녀들을 둘러보자면 이 가설이 충분히 납득이 가죠), 미모에 따라 츤데레 속성이 어떤 상호작용을 보이는가 하는 연구들을 시행하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츤데레는 어리고 예뻐야 진리.

by 나비의일견식 | 2009/03/24 22:14 | 장난조로 길을 묻다 | 트랙백 | 덧글(11)

츤데레의 진화심리학적 해석

여차하면 양육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지지 않고 내빼면서도 자신의 자식을 거의 무한정 낳을 수 있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9~10개월의 임신 기간을 버텨낸 후에야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식을 겨우 하나 얻어낼 수 있다. 때문에 여성은 짝짓기 전략을 추구할 때 남성보다 급작스런 성행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상대방 남성이 자신에게 9~10개월의 임신기간, 그리고 그 이후의 양육 기간에도 지속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자식에게 자원을 투자해 줄 수 있는 남성을 고르는 전략을 주로 택한다.

이렇게 지속적인 자원 투자가 가능한 남성은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지 않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즉 헌신적인 특성을 가진 남성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키라던가 자지길이라던가
하는 특성과는 달리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여성은 남성의 헌신성을 테스트하기 위한 방법을 진화시켰는데, 그 중의 하나가 츤데레이다. 츤데레는 다가오는 남성에게 일부러 츤츤거리며 자신이 단기적인 성관계를 가지지 않는 사람임을 주지시키고(여기서 단기적 성 전략을 가지고 접근해 온 남자들은 한 번에 물러서게 된다), 그 후에도 여러 남성들의 관심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츤츤거려서(여기서는 장기적인 성 전략을 가지고 접근해 온 남자들도 헌신성이 부족하게 되면 물러날 수밖에 없다)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남아 있는(즉, 헌신성이 강한) 남성을 택하게(데레) 된다.

이렇게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츤데레가 오히려 남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성들이 츤데레의 전략을 추구하는 여성에게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은 성격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문란한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 남성 특유의 심리적 기제는 까딱하면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남성의 아이를 대신 양육하게 될 지도 모르는(NTR) 큰 손실을 방지해 준다. (남성이 단기적 짝짓기 전략을 추구할 때는 좀 달라진다. 그 때는 남성은 문란한 여성을 좀 더 좋아하게 된다.) 츤데레와 짝짓기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한 번 확실하게 데레를 받아 놓으면 그 후엔 부성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확실한 보험으로 작용한다.

사진은 오나니마스터 쿠로사와에서 츤데레의 정석을 보여주는 주인공의 상대역. 그녀의 저 바램과는 다르게 저런 모습이 딸감으로 쓰이는 것이 남성의 진화적 심리.

추가: 오덕계에서 츤데레가 그만큼 인기있다는 사실도 재미있는 주제. 그것은 그만큼 덕후들이 단기적 짝짓기 전략보다는 장기적 짝짓기 전략을 좀 더 추구한다는 소리 아닐까? 나이트나 클럽에 자주 간다는 덕후를 알거나 본 사람은 얼마 없다는 사실을 검증하기, 혹은 덕후들이 마법사가 잘 된다는 가설같은 것들을 좀 더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by 나비의일견식 | 2009/03/24 16:25 | 장난조로 길을 묻다 | 트랙백(3) | 핑백(1) | 덧글(137)

[영화]간지와 츤데레에 대한 영화, 그랜 토리노

보수주의니 고집쟁이니 하는 얘기는 시시할 정도로 당연한 얘기고, 난 이스트우드 옹이 하고 싶은 말은 그것들을 넘어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할배가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다. 첫째는 간지고, 둘째는 츤데레다.

1. 간지에 대해서

원래 간지란 보수주의의 상징이며, 말하자면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예비역 장성 군복과 같은 것이다. 니뽄간지 따위는 간지 축에도 들지 않는다. 가능한 한 오래되면서도 뻔떡뻔떡한 그랜 토리노 같은 것,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며 입는 군복과 훈장 같은 것이다. 시부야 게이들이 삐쩍 마른 몸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체인이나 모조 계급장 같은 건 짝퉁 혹은 시뮬라시옹에 불과하다. 훈장과 계급장의 간지란 것은 정말로 나라를 지켜내고 얻어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 몇 죽여본 처절한 기억과 함께 국가에 대한 거룩한 애정과 충성도가 있어야 근육질 우락부락한 몸에 군복간지가 피어난다.

그러니까 감독님은 바로 그 간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랜 토리노로 대변되는 겉모습의 간지와 함께 흑인 갱스터 몇 마리들에게 전혀 쫄지 않고 개길 수 있는 마음상태를 갖춘 진정한 폭풍간지.

2. 츤데레에 대해서

그렇다. 중요한 건 마음상태다. 우리의 구동림 옹은 자칭 진보니 패션이니 깝죽대는 젊은이들에게 '진정한 간지란 무엇인가'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츤데레'다. 츤데레적 요소가 빠지면 그의 간지는 마지막 벽돌을 쌓지 못해 와르르 무너진 아치와 같도다.

동양놈 이태리놈 깜둥이놈 다 씨부리고 다니면서도 마지못한 듯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펼치시는 그의 마음가짐. 그 츤데레적 간지! 그것이야말로 겉멋만 잔뜩 든 우리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 것이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단지, 인종에 대한 개그를 하며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그에게 '꼴통 국수주의자'란 오명을 씌우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인종 개그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진정 쿨한 간지남이라서 사람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며, 자신이 남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그것밖에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람들간의 대화의 비법을 터득해 인종에 관한 그의 재미없는 개그를 하지 않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현란한 말솜씨로 얌얌이한테 작업을 걸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그 시점에서 폭풍간지남에서 찌질한 찝쩍노인으로 추락해 버리고 만다. 그의 그 거칠고 보수적인 말투 하나하나가 그의 간지를 완성시켜 나가는 핵심 요소이며, 더욱이 그 안에 숨겨진 인간에 대한 츤데레적 애정이야말로 그 간지의 화룡정점이도다.

3.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들이여, 그에게 배울지니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뭐나라당)은 그에게 배울 점이 많다. 첫 번째는 간지고, 두 번째는 츤데레다. 군복만 입는다고 간지가 아니다. 국회에서 이단옆차기를 잘 한다고 간지가 아니다. 말하자면 보편적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그 애정을 츤데레적으로 표현할 약간의 양념과도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난 슬프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에서 진정한 노년 폭풍 간지남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노 정치인의 츤데레적 싸가지를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

4. 밑에부터는 스포일러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띠고 그랜 토리노를 멋지게 몰고 달려가는 테오의 모습을 비추며 행복한 결말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수를 강간하고 간지할배를 죽인 갱들에게 테오가 또 다시 피의 복수를 할 공산이 훨씬 크다. 거듭되는 복수와 복수의 연쇄는 확실히 끊기 어려운 사슬이다. 영화의 결말인, 이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한 간지 할배의 잔머리는 내 생각엔 별로였던 것 같다. 희생이 너무 컸고 악인들의 처벌은 너무 약했으며,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by 나비의일견식 | 2009/03/22 22:52 | 삶은 문화 | 트랙백(1) | 덧글(10)

70 - 두 과학자

난 세계 일인자야. 그가 말했다.

나도 너에 뒤지진 않지. 나도 내 스승님만 빼놓고 본다면 세계에 그 누구도 나와 맞설 상대는 없으니까. 내가 말했다.

그랬다. 그는 자신의 학위논문으로 슈퍼울트라양자대칭에 대한 양안경합의 부등성이라는 세계 초유의 논문을 들고 나온 젊은 과학자. 그가 연구하는 분야는 어느 누구도 시도해 본 적도 없고 본적도 들은적도 상상조차도 해 본적이 없는 말 그대로 미개척지. 그는 그 분야의 유일한 연구자다. 세계 일인자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아무도 그의 연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또다른 문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분야를 재미없어 한다는 것.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깐따삐야 별의 동물의 생태에 관한 성격심리학 연구라는 박사논문으로 세계의 (무)관심을 한몸에 받은 연구자. 나의 스승은 불모지인 깐따삐야 별에 홀로 들어가 혹독한 자연의 시련을 겪으며 대성한, 깐따삐야 별 연구의 일인자이며, 나는 그분의 수제자로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깐따삐야 별의 연구를 이어받은 생태학자다. 문제는 이 전 우주에 깐따삐야 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단 둘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과학자다. 진리탐구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난 이 일이 좋다. 그도 그의 일을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 일인자라는 타이틀에 대해.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미개척지를 탐험하는 것에 대해. 춥고 배고픈 학문에 대해. 돈과 권력을 가지지 않고 순수한 열정만으로 일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젊다! 우린 미래가 있다! 우린 열정이 있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세계 일인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섭씨 오만 도의, 수소핵융합을 일으킬 만한, 지옥불과도 같은 무시무시하게 뜨거운 열정!

우리는 밤새, 서로에게조차 이해 안되는 그런 얘기들을 밤새 그렇게 떠들어댔다.

by 나비의일견식 | 2009/02/19 05:21 | 나의 픽션들 | 트랙백 | 덧글(2)

위대한 사람이 되자 캠페인 - 1. 독단적 개인을 집단적 정체성으로 싸잡아 묶어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은 집단의 어디에 속해서 그것의 정의를 대변할 수 있을 '전형성을 소유한' 사람이 안 된다.

예를 들어 2002년은 월드컵의 마초적 승부주의에 대한민국 전체가 광기로 얼룩졌던 땐데(이렇게 말하면 흥분할 분들 계시려나? 자, 그냥 개인적 의미로 다가온 느낌을 말씀드린 것 뿐이다. 흥분 금지) 솔직히 말해서 예선에서 포루투갈을 이겼던 것까진 좋았고 뭐 응원하는 것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하고 특히 1대 1로 승부를 가리는 스포츠(특히 공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스포츠)는 피가 말리는 그 기분을 별로 즐기지 못해서 축구라는 껨을 싫어하는 편이다. 그래서 포루투갈을 이겼을 때는 자, 이제 이만하면 됐다. 져도 용서해 주마라는 생각을 했고 8강이니 4강이니 자꾸만 올라가는 성적 자체도 걍 뭐 오 한국 잘하네 이정도 생각 뿐이었고 솔직히 말해서 좀 지겨워지는 면이 있어서(경기 자체가 슬슬 재미없어지기도 하고) 이젠 고만 좀 져줬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는 뭐 일제의 만행이니 정신대니 하는 얘기들에 피가 들끓어 오를 때도 있었지만 왜 나 자체가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종속되어서 왜 내 이익이 되지도 않는 다른 누군가의 승리를 기뻐해야 하나, 혹은 내가 피해도 가지 않는데 왜 같은 국민이라는 이유로 패배를 슬퍼해야 하나라는 의문을 가졌다.

딴 예를 들자면, 지금 한국 돌아가는 꼬라지에 대한 얘긴데, 좌빨이니 우꼴이니 하며 별 그지같은 양분법 담론에 내가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좌파긴 좌판데 뭐 정치적으로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어쩌고 하는 공산주의 빨갱이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우리나라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나에서 하는 얘기들에 대충 공감은 가지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또 우꼴들이 지껄이는 시시껍질한 좌빨 욕하기에 내가 해당되는 사항도 없고, 내가 주장하는 바는 뭐 한 마디로 대충 정의하자면 생태주의적 좌파? 뭐 이런 건데(더 자세히 말하자면 피터 싱어적 공리주의자) 우리나라에서 이런 좌파가 있다는 건 또 들어보지도 못했고, 정당같은 게 있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지경이니.

또 딴 예를 들어보자면, 말 나온 김에 피터 싱어적 채식주의에 대한 건데, 채식을 한다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봐도 내가 생각하는 채식을 하는 이유같은 거와는 좀 다른 느낌이라. (아 물론 요새는 채식 안 합니다. 사실 전에도 베간이니 뭐니 하는 그런 거 한 적도 없습니다. 채식한다고 뻥치면서 닭도 꾸준히 먹었죠. 단지 고기를 줄이는 걸 꾸준히 노력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왜 윤리학을 과학이 결정하냐고 하셨던 분들이 많은데, 전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제 모든 글들은 윤리학이 먼저 결정된 후, 윤리학이 과학을 참고할 수 있다는 얘기들입니다. 글을 좀 바르게 읽으시길). 아 뭐 어쨌든 뭔 이글루스 내에서 나랑 상관없이 채식주의가 어쩌구 싸웠던 거에 대해 어떤 아주 예의바르신 분들이 싸잡아 비난하시는 걸 본 후 내가 홧김에 열받아서. 가 아니고 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 정중히 댓글을 달아드렸더니 아주 그 사람 추종자들이 잡아먹으려고 안달이셨던 그런 사건이 몇달 전 있었드랬지요.

그래 또 요 블로그와 이글루스에 대한 얘긴데, 전에 누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이글루스 안에서 졸라 떠들고 지네들끼리 싸우던 문제를 내가 몰랐던 걸 상상조차 못했다고 하셨더래. 아니 뭐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우고 오덕후가 어쩌고 채식교가 어쩌고 하는 걸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 같은 이글루스를 쓴다는 이유로?

집단은 중요합니다. 암 중요하고 말고요. 하지만 그건 제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죠. 전 속하는 집단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전 가끔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엄청나게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집단(예를 들면, 좌빨, 채식주의)'을 욕하는 글을 보며 가끔 욱하곤 해요, 가 아니고 그분들이 좀 잘 모르시는 것 같고, 그 포괄적으로 정의된 집단의 정의에 당신이 욕하는 그 사람들이 아닌, 무고한 사람(예를 들면, 나)이 들어갈 수도 있으며, 전 그 욕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좀 알아주십사 하고 글의 밑에 댓글을 답니다. 그리고 남의 의견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내 부족한 글을 읽는 것보단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쓴 책을 읽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제가 권하는 책을 좀 읽어 보시고, 제 의견이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것을 좀 이해해 주십사 하고 권하지만, 뭐 보통은 소귀의 경읽기. 언제는 이런 얘기도 들었지. 잘 기억은 안나는데, 책읽는 사람이 나로 인해 전부 싸잡아 욕먹는다고. 아 예.

당부 하나 드리자면, 뭔가를 욕하실 때는 그 뭔가의 집단이 어디까지인지를 꼭 공부하시고, 그 외연이 내가 욕하려는 바로 그 집단과 필요충분이 될 때만 욕하도록 합시다. 그 뭔가의 집단이 어디까지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공부합시다. 책을 읽읍시다.

by 나비의일견식 | 2009/02/12 02:10 | 장난조로 길을 묻다 | 트랙백 | 덧글(4)

69 - 천재와 수집가

천재의 그 무뚝뚝한 표정이 허물어졌다. 내심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정말로 대단한 악기 수집가인듯 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세상에 몇 대 없을 명품 바이올린을 비롯해, 먼지하나 묻지 않게 잘 닦여진 그랜드 피아노와, 수백만원대를 호가하는 일렉트릭 기타들이 벽에 주렁주렁 걸려 있고, 물론 컴퓨터에 연결된 수천만원짜리 신디사이저는 기본, 오쿨렐레라든가 팀발레스라든가 시타르라든가 하는 이국적인 악기들, 아 물론 방의 구석엔 번쩍거리는 더블베이스 드럼세트까지.

수집가가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말이야, 창고엔 딴 것들도 많아. 여기 있는 건 전시용이고, 특별히 비싼 것만 모아 놨지. 어때? 내 수집품들 괜찮아 보이나?”

천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현란한 손가락 놀림으로 복잡한 재즈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절 여기에 데려오신 이유가 뭐죠?”

천재가 수집가에게 물었다. 손가락은 여전히 프리에 가까운 전위적인 텐션 코드를 연주하고 있었다. 수집가가 말했다.

“자넨 말이야, 이것들을 좀 이용해 주었으면 해. 짐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소질이 없는 것 같아. 난 단지 수집가일 뿐이라고. 보라고. 악기에 때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잖나. 이 악기들은 썩히기엔 너무 값비싸. 자네가 이것들을 가지고 뭔가를 해보게.”

“그 후엔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재즈 음반을 만드는 거지. 할 수 있겠나?”

천재는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랬다. 그는 이 세상에서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불세출의 천재. 그가 처음 만져보는 종류의 악기라도 1분도 안되어 5년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 이상의 실력으로 연주해 낸다는 슈퍼 초 울트라 천재 연주자. 하지만 돈도 없고 집도 없어 항상 남의 싸구려 악기를 빌려 연주를 한다는 떠돌이 음악가. 천재라는 소리를 몇십 년째 들으며 살아도 레코딩에 관심조차 없어 지금껏 변변한 앨범 하나 내지 않았던 음악계의 방랑자.

그가 이제 곧 녹음을 시작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재즈 음반을.

by 나비의일견식 | 2009/01/29 03:26 | 나의 픽션들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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